'이방인' 책 서평(저자 알베르 카뮈/실존주의 철학)
작년까지 나는 철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대한민국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고자 입시에만 열중하였다. 하지만 입시에서 실패를 겪고 허망함을 느낀 나는 조금씩 철학과 경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몰아붙이고 좋은 학벌, 좋은 대학에 집착하게 만들었던가. 코로나 언택트 시대가 된 요즘 일반적인 대학의 이미지가 조금씩 옅어져 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대학이 온라인 강의를 진행하며 사실상 기존의 사이버대학과 다름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대학생들간 직접적 교류가 끊긴 상황에서 고학력 학벌의 장점인 인적 네트워크가 무의미해지고 있다. 결국 내가 믿어왔던 대학의 존재 이유가 조금씩 변화해가고 있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절대적인 가치라고 여겨졌던 학벌도 이제 서서히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세계의 변화에 발맞춰 나의 가치관도 변화해야 할 시점이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부수고 세계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관이 필요하다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철학이다. 결국 철학을 공부해야 함을 깨달았다.
유튜브에서 철학관련 영상을 챙겨보던 중에 사르트르와 관련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어느 교수님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었는데 굉장한 감명을 받았다. 실존주의 철학을 한 줄로 표현하면‘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본질) 보다(본질) 앞선다는 말로 갖 태어난 인간은 본디 백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한 수많은 선택들로 그 인간의 속성(본질)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봉사활동을 하며 삶을 살아가면 나라는 존재에 ‘봉사활동을 하는 나’라는 속성(본질)이 덧입혀 지는 것이다. 내가 읽은 책은 사르트르와 함께 실존주의 문학가로 여겨지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책이다.
이방인, 그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함
소설은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한 시점을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다. 1부에서는 알제리의 도시 알제에서 선박 중개인으로 일하는 뫼르소가 마랑 고의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마랑 고로 간다. 장례식 고유의 예절조차 가지지 않고 내내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그에게 양로원 사람들은 놀란다.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울기는 커녕 전혀 슬픈 기색조차 비치지 않고 오히려 장례식으로 부여받은 4일의 기간을 어떻게 때우면 좋을까하는 생각뿐이었다. 장례식 이튿날 그는 해변에서 옛 사무실 동료 마리를 만나 영화를 본 후 집으로 와서 동침한다. 평범하고 무심한 일상생활이 계속된다. 어느 날 같은 층에 사는 이웃 레몽과 친구과 되는데, 이 관계가 뫼르소를 죽음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뫼르소는 변심한 아랍인 애인을 벌주려는 레몽의 음모에 수동적인 태도로 가담한다. 며칠 후 레몽, 뫼르소, 마리 일행이 레몽의 친구 마송의 초대로 해변에 놀러 갔을 때 일행을 미행한 레몽 전 애인의 오빠 일행과 싸움이 벌어진다. 레몽이 다치고 싸움은 끝났지만 뫼르소는 가슴이 답답해서 혼자 그늘진 샘을 찾아간다. 싸움의 와중에 흥분한 레몽으로부터 빼앗은 권총을 품에 지닌 채.......
샘에는 이미 래몽 애인의 아랍인 오빠가 와서 그늘에 누워있었다. 팽팽한 대치 속에서 아랍인이 칼을 꺼냈고,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태양빛이 반사된 강렬한 빛에 눈 먼 뫼르소는 자신도 모른 채 방아쇠를 당긴다.
2부에서는 재판과정을 담고 있다. 뫼르소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듯 그저 관객 중 한 사람이 된 것 마냥 재판을 구경하듯 바라본다. 예심과 본심에서 그에게 쏟아진 질문은 아랍인 살해 경위가 아니라 어머니 장례 태도에 관한 것이다. 어머니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마리와 놀러다니거나 장례기간을 마치 휴가기간처럼 보낸 뫼르소의 행동이 뫼르소를 마치 무감한 사이코패스처럼 보이게 만든다. 사실 당대 역사를 보면 프랑스인이 프랑스 식민지 국가 알제리 토착민인 아랍인을 살해한 것은 치명적인 범죄가 아닐 수도 있었다. 뫼르소가 법정의 질문에 거짓을 섞어서 요령껏 대답했다면 뫼르소는 충분히 사형선고를 피할 수 있었고 변호사 역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법정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 책은 처음 접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정말 난해한 책이었다. 문장 자체는 단순하고 구어체로 쓰여져 읽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그 단순함 속에 숨어있는 심오한 무언가가 보일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았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의문투성이었고 좀처럼 시원한 느낌이 들지 않아 유기환 선생님이 쓰신 ‘알베르 카뮈’라는 카뮈가 쓴 책에 관한 해설서를 참고했다.
부조리와 반항, 그리고 시지프 신화
카뮈의 책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장 먼저 알아두어야 할 단어는 ‘부조리’와 ‘반항’인것 같다. 유기환 선생님의 책에 따르면 부조리는 인간에게도 세계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합리성을 열망하는 인간과 비합리성으로 가득 찬 세계 ‘사이에’ 있다. 인간에게는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사회는 항상 이성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 이성과 세계 사이의 간극이 바로 부조리이다. 그렇다고 부조리가 합리적인 추론으로 탄생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서로다른 이상향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이런 세계관을 모두 통일시킨 세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부조리란 논리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조리한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카뮈는 ‘시지프 신화’라는 책에서 부조리한 삶에 대한 대책으로 ‘자살’, ‘희망’, ‘반항’ 세 가지를 예시하면서 그중 마지막의 것을 참된 해결책으로 꼽았다. 부조리는 합리성을 열망하는 인간의 의식과 비합리성으로 점철된 세계 사이의 대립에서 발생한다. 자살이 해결책이 못 되는 것은 ‘인간의 의식’ 그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희망(종교)이 해결책이 못 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 세계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문제의 돌파구는 세계와 인간의 의식 사이의 간격에 있지 특정 대상 그 자체를 제거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반항이란 세계의 부조리를 당당히 마주하며 정면으로 싸우는 것으로 카뮈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행복한 시지프’를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제우스의 일을 방해하고,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인 죄로 시지프는 거대한 바위를 뾰족한 산정에 들어 올리는 벌을 받았다. 시지프는 이미 계속되는 실패로 이것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았다. 하지만 시지프는 이러한 부조리함에 맞서 온 힘을다해 살아가기로 작정한다. 계속해서 바위를 산정으로 들어올렸고 이윽고 바위는 다시 산기슭을 향해 굴러 떨어졌다. 시지프는 바로 그 간발의 순간 기를쓰고 바위를 산정에 올려놓는 그 순간 비로소 한순간이나마 자신의 성공을 행복해하며 다시 산기슭을 따라 바위를 들어 올리기 시작한다. 그는 신이 내린 벌에 고통은 커녕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부조리의 한계속에서 지지 않고 당당히 저항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압살하고 찍어누르는 세상의 부조리를 견디는 반항아로 살아간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보자. 소설 2부 재판의 초점은 아랍인 살인사건이 아닌 뫼르소의 도덕성에 맞추어져 있다. 뫼르소가 어머니 장례식장에서도 예의를 갖추지 않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며 여자 친구인 마리와 데이트를 즐긴 것이 문제가 되었다. 정작 재판의 주요 쟁점인 살인사건과 관련된 부분은 재판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뫼르소는 이에 대해 태양이 눈부셔 우발적으로 죽이고 말았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지만 사람들은 감정이 없는 천성적인 사이코패스의 살인극으로 몰아가고 결국 사형을 선고한다. 마치 뫼르소가 살인을 해서 범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이기에 살인을 했다는 개 같은 논리를 펼치는 것이다. 뫼르소는 어떠한 탄원도 항소도 하지않고 종교를 믿을 것을 강요하는 부속 사제의 말까지 뿌리친 채 당당히 사형을 받아들인다. 뫼르소는 사형 당일날 구경꾼들이 자신을 더욱더 증오해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부조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증오의 함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죽음은 더욱 부조리한 죽음으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고정관념과 선입견 등으로 점철된 사회, 그 속에서 우리는 부조리에 반항하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굴복하여 부조리한 사회의 부품으로서 살아가는가. 소설 ‘이방인’에 나온 뫼르소처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정말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는 것인가.(카뮈의 해설) 나도 이 소설을 막 읽었을 당시에는 마치 뫼르소의 사형이 정당한 것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부조리한 사회가 심어놓은 환상에 눈이 멀어있었다. 뫼르소는 부조리에 속지않고 진실만을 말했기 때문에 사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