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책 서평(저자 에리히 프롬)

사람들은 끊임없이 욕망에 휘둘리며 산다. 돈, 사랑, 명예 등을 끝없이 추구하며 그것들을 얻기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항상 더 높은 지위, 많은 부를 위해서 살며 존재 의미를 사회적 위치에서 찾는다. 대학교를 순위별로 구별하고 기업들을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으로 나누며 계속해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질투하고 시기하고 끝내는 좌절한다. 설령 만족감을 얻는다해도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행복해보이는 사람을 발견하는 순간 금방 우울감에 빠져든다.
행복의 기준이 항상 외부에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비교를 통해서만이 행복해질수 있고 불행을 죄로 받아들인다.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며 나를 불행하고 처량한 사람으로 만들고 죄악감에 시달린다. 사회가 만들어낸 틀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판단하고 사회적기준을 충족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행복은 일시적인 쾌락에 지나지 않는다. 또다시 공동체의 틀안에 속하게 되면 비교를 통해서 우울에 시달린다. 모든 쾌락에는 항상 불쾌감이 뒤따르고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많이 소유한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메시지는 마치 사회의 공식처럼 자리잡았다. 소유가 곧 삶의 목표인 것처럼 여겨지고 계속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기위해서 집착한다. 소유가 삶의 목표가 되면 많이 소유하면 할 수록 스스로의 존재가 뚜렷해 질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소유한 것들을 모두 잃어버린다면 스스로의 존재는 무가치해져 버린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또 많이 가졌다고 하더라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질투하며 더 적게 가진 사람들에게 빼앗길까 걱정한다. 이러한 감정들을 모두 억누른 채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마음속은 계속해서 시기와 두려움으로 썩어문드러지지만 아닌 척 하며 산다.
나 또한 학벌에 집착했던 적이 있었다. 나보다 높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고 대학교를 지나갈 때마다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속에서는 이미 질투와 시기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잘나보였고 나 또한 저 대학을 다닐수 만 있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러지 못한 현실에 좌절했다. 대학교 근방을 지날때마다 무기력과 좌절감에 시달렸고 자신을 무가치한 인간이라 여겨왔다.
내가 저 대학교를 다닐 수 만 있다면 나는 달라졌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에겐 무엇보다도 대학교를 가야할 확실한 동기가 없다. 그저 취업을 위한다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목적에 따라 사고했을 뿐이다. 내가 가진 학벌은 나의 소유대상으로 존재하며 나 역시 내가 소유하고 있는 학벌에 의해 규정됨으로써 내가 학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 학벌이 나를 소유하는 것이 된다. 학벌이 나의 존재 의미가 된다. 학벌로부터 나의 존재를 확인하려 하면 할수록 나는 학벌에 예속된다. 이런 소유양식은 나라는 존재를 한낱 소유할수 있는 ‘물건’으로 만들어버리며 주체의식을 상실하고 만다.
나라는 존재가 한낱 ‘물건’에 불과하다고 생각해보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쓰여질 때만 좋지 기능을 상실하고 무가치해진다면 금방이라도 버려질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버려질까봐 두려워 하루하루를 긴장과 불안속에서 살아야한다. 주변사람들을 경쟁상대 내지 적으로 취급하며 그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빛나보이기 위해 쓸모 있는 ‘물건’이 될것을 추구한다. 물건으로써 더 가치있는 물건이 되기 위해 죽을때까지 소유욕구에 시달리며 세계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는 한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현대의 과학적 사유는 항상 사물의 근거를 따져 묻는다고 한다. 장미를 볼때도 장미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보고 느끼기 보다는 왜 장미가 아름다운지를 탐구한다. 그 이유를 알고 장미의 아름다움을 우리의 뜻대로 통재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입맛대로 개조되고 파괴되어버린 장미를 더이상 장미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눈에 비치는 진짜 장미는 사라지고 장미가 될 수 있는 조건들 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 조건들에 의해 재형성된 장미는 더이상 장미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라볼때 몇몇 외적으로 비치는 모습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 대학은 어디 나왔는지, 하는 일은 무엇인지, 얼마나 잘생겼는지.....등등. 여러가지 조건들을 결합해 이미지를 형성하고 그 사람의 내적인 자아와 동일시한다. 조건과 근거를 수단으로 삼아 그 사람의 속성을 판단하고 예측한다. 이렇게 조건들에 의해 퍼즐처럼 재결합된 사람을 우리가 본 그 사람이라고 함부로 결정짓는다. 더이상 그 무엇도 알려고 하지 않은채......
따라서 사람들과 진정한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앞서말한 조건들을 모두 잊어야한다. 알려고 해서도 안된다. 그저 그사람의 일부일뿐 전체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이나 지위에 관해서도 고려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무장하지 않고 경계심을 풀고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게된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는 존경하는 척을 하지만 실은 경계를 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진실된 대화가 불가능하다.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밑보이지 않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기만한다. 어떻게든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와 내 사회적 지위를 동일시하려고 애를 쓴다. 자기 자신을 현란하게 치장하고 스펙을 쌓고 그 사람처럼 되기위해서 혹은 더 높은 곳에 서기위해 노력한다.
나는 사람과 진심으로 소통하려 한적이 있는가. 나 역시도 사람을 외적인 조건들로 판단하고 그것이 그 사람이 전부인 마냥 생각한적 있지 않은가.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마지막에는 스스로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죄악감에 몸부림쳤다. 항상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해야한다’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것이 뭔지 알지 못했다. 사회의 틀에 얽매여 발목잡히고 빠져나오지 못했다. 공허하고 우울했다. 지금도 확실하게 알지는 못한다. 다만 지금까지의 삶이 틀렸고 내가 어리석었다는 것은 깨달았다.
이제 내가 해야할 일은 사회가 만든 암시적인 환상을 쳐부수는것이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인식을 통해서 진정한 행복을 위한 진실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주변 사람들이 부러운 부분은 이해하지만 질투와 시기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사회가 만든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틀에서 벗어나 있으며 주변 사람들도 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죄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야만 소외감이 아닌 공동체감각을 느끼고 자주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사랑을 위해서 온 열정을 다 쏟아붓던 사람도 사랑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랑이 시들어 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침내 소유했다고 여기는 순간 그 사람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게되고 소홀히 하게 된다. 상대방을 이미 자기 소유인 ‘물건’으로 여기기 때문에 굳이 노력해서 열정을 쏟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옛날의 사랑했던 나날들은 추억속으로 사라지고 그들은 마치 환각에 홀린 것처럼 사랑에 속았다고 여기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상대방에게 환심을 사려고 열정을 쏟는 것이 아닌 그저 순수하게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론 사람마음이 보상심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해주면 나도 이정도는 받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대해서는 안된다. 기대감을 내려놓자.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사랑에 배신을 당하더라도 금방 일어설 수 있다. 기대감을 가지는 만큼 배신감도 커질 수 밖에 없다. 결국 자신이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것이다.